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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해진수학/이런 저런 생각들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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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을 보고 어떤 사람은 싸우고 있지 않은데?라고 자신을 배제시켰을지 모른다.

싸운다는 것을 어린 시절 나는 부정적인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짧지만 지난 과거를 생각해봐도 작고 큰 싸움이 엄청 많았다.

그것을 인식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싸움닭이 된 것처럼 나를 잠시 부정했던 것 같다.

지금은 싸움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싸움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더 나아가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또 이 문장을 쓰니 내가 마치 싸움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평화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베트남 전쟁, 월남전?에 대한 이야기인데 나는 역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므로 그저 기억 남는 주제만 거론하겠다.

사실 이 전쟁에서 미국과 베트남은 서로 다른 대상을 주제로 싸움 아니 전쟁을 했다고 한다.

베트남은 사람의 마음을 쟁취하려고 했고 미국은 영토를 쟁취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역사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린 싸움의 대상을 파악해야 한다.

싸움의 대상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과거에는 내가 아닌 타인과 싸움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싸움이 가장 크게 작용했으리라 기억한다.

이를 반복하면서 내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명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즘은 나는 나 자신과 더 많이 싸운다.


과거의 부족한 내가 버릇이라는 형태로 현재의 나를 이기려고 한다.

끊임없이 지면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이기리라고 다짐하고 전략을 세운다.

이 전략은 과거의 나를 바라보면서 반성을 통해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전보다 좀 더 최근의 과거의 나는 더 세련해져 있다.

가까운 과거의 나는 내가 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다른 방법으로 이기려고 한다.

변수라는 것이 적으면 적을 수록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문제를 풀기 쉽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싸우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변수들이 등장한다.

그것이 타인이다.

타인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나에게 싸움을 걸어온다.

음... 엄밀히 말하면 타인은

때론 사랑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동기로 다가온 것이지만

과거의 타인에게 현재의 타인이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사실은 나에게도 해당할지 모르지만, 이를 '꼰대'라고 한다.

라떼는 말이야...

과거의 나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어른의 모습이다.

현재에 살고 있지만 과거의 자신에게 지고 심지어 지고 있다는 인식도 못 하며 살아간다.

이는 타인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싸움을 걸어온다고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른과 함께 어떤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어린 우리에게는 매뉴얼이 없다. 사람마다 눈치도 제 각각이므로...

어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한다. 어른은 매뉴얼이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어린 우리는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물어보고 시도를 한다.

어른의 과거가 만약 물어보지 않고 눈치 보며 잘 처리하는 사람이라면

어린 우리가 '질문'을 좋게 바라볼까?

아니면

어른의 과거가 만약 하나하나 물어보고 진행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린 우리가 '눈치'를 보고 알아서 하는 것을 좋게 바라볼까?

지금 이 질문에 대답을 한다는 것은 바로 과거의 어른이 현재의 어른을 이겼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이 질문에 대답을 '모른다'라고 대답한다면

어쩌면 현재의 어른이 과거의 어른과 싸우고 있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관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경험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그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 경험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경험하지 못한 모든 것들을 잃게 된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수업을 할 때도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학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생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경험했던 즉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이기고 학생들을 대한다면

나는 분명 "나와 같은" 학생들을 좋아할 것이 분명하다.

학생들은 모두 다르다.

과거 아니 현재까지도 나와 같은 학생이 있지만

사실 대부분은 나와 많이 다르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내가 현재의 나로 존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들이 내 가치관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도 내가 가치관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늘 깨어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이 글을 쓰면서 이 자체도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 문장 자체도 내 가치관을 수용하라고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히 좋은 표현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으므로...


옳다 그르다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 표현에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 나쁜 것처럼 전달했다면

그것은 아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나의 표현에 의하면) 지는 것이 더 현명할 때가 있다.

끝으로 어떤 유명 연예인의 TV프로그램에서 말한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다.

A: 나는 화가 많아요

B: 그렇군요

A: 나는 동생이 빨래를 몰아서 하는 경향이 있어서 잘 안 마르고 불편해서 제습기?를 사줬습니다.

A: 그런데 동생이 잘 관리를 안 해서 제습기?에서 물이 넘쳐서 화가 납니다.

B: 그게 동생 때문인가요?

A: 음... 근데 제가 동생을 생각해서 사줬는데, 물의 용량이 작아서 쉽게 넘치거든요

B: 그게 동생 때문인가요?

A: ..... 아??!!!

가끔은 나의 화남, 나의 예민함, 나의 불편함이 현재 내가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내가 느끼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보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다.

마음이 불편한 것을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잘 처리하는 사람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다.

독서실의 남의 작은 책 넘기는 소리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공부를 하면 나의 심장소리가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독서실의 작은 미세한 소리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편하게 느끼고 있는 내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

내가 학생 때 엄청 예민했는데,

이 소리는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공부하는 것이 불편한 내가 만들어낸 핑계거리였다.

중요한 시험에서 소리의 예민함이라는 이유로 망가진 내 점수를 바라보며 반성한 나는

그때부터 일부러 시끄러운 곳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극복했고

지금도 시끄러운 곳을 오히려 선호하게 됐다.

시끄러운 주변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바꾸는 현상은 내 집중력의 향상을 알게 해주는 지표였다.

나는 지금도 과거의 내가 편하다는 이유로

지금 현상에서 나의 감정과 판단을 좌지우지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따라서 나는 늘 싸우며

때론 지고

때론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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